<문화인류학> 문화 상대주의의 역사 출간 도서




엘빈 해치 (지은이) | 박동천 (옮긴이) | 모티브북 | 2017-03-30 | 원제 Culture and Morality: The Relativity of Values in Anthropology (1982년)

서로 다른 사회의 가치들은 모두 동등하게 타당한가?

『문화 상대주의의 역사』는 미국 인류학계에서 문화 상대주의가 유행처럼 등장했다가 쇠퇴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19세기에 유행한 진화론적 사고에는 진보를 향한 단선적 낙관과 산업화로 대표되는 서양 문명이 우월하다는 함의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다른 문화의 가치를 서양의 시각만으로 재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반성이 일어났다. 더불어 20세기 전반에 발생한 전쟁은 산업화된 군대와 무기로 유례없이 참혹했다는 점에서, 서양 문명에 관해 종전과 같은 낙관론이 견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화 상대주의는 인류학만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 전체에서 주목 받는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 주제의 연구가 계속 되지 못한 이유로 해치 교수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윤리적 차원에서 문화 상대주의가 난관에 부딪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비서양 사회 내부에서 전통 문화보다 산업화를 선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문화 상대주의가 봉착하게 된 윤리적 난관이란 모든 것을 관인할 수는 없다는 오래된 반문을 가리킨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이 서양 문명 전반에 관한 반성을 촉구하게 된 이유 중에는 히틀러가 자행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반인류적이라는 도덕적 결단이 포함된다. 그러면서도 야노마뫼 사회 같은 곳에서 만연하는 폭력을 관인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해치는 이 난관을 우회할 수 있는 것으로 “인도주의적 표준”에 어긋나는 행태들에 관해서는 다른 문화에 속하는 일에도 일정한 수준의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면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단지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서양인의 눈에 이상해 보일 뿐인 행태들에 대해서는 관인이 요구된다는 입장이다.

해치는 비서양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전통보다 산업화를 선호하는 현상으로부터 완강한 상대주의의 입장을 양보해야 할 이유 하나를 발굴한다. 의료나 물질적 풍요 등,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측면에서 산업화의 덕목은 문화 상대주의를 초월하여 진보라는 개념에 관한 하나의 척도를 제공한다고 본다. 다만, 한 사회 내부에서 산업화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변화를 선도하는 현상 자체는 “진보” 또는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폭력이나 억압보다는 설득과 소통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인도주의적 표준”에 어울린다는 입장이다.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더 나쁜지를 결정할 기준은 없는가?

“상대주의”라는 호칭으로 지칭되는 사람들 가운데 고대 그리스의 피론처렴 모든 일이 불확실하고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전해지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실제로 그가 무슨 주장을 펼쳤는지는 기실 분명하지 않은데, 설사 그런 입장을 취했더라도 한 가지 사항은 분명하다. 피론이라고 해도 인생의 수많은 고비에서 뭔가 선택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바로 그 점에서 마냥 상대주의적인 원칙을 고수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즉, 세상에 아무런 기준이 없다면, 상대주의를 지탱해 줄 기준도 없어지고 만다.

진리의 기준이든, 윤리의 기준이든, 한 사회 안에서 어떤 기준이 통용된다고 할 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이 다른 사회에도 통용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명백히 오류다. 물론 하나의 기준이 두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떤 두 사회가 어떤 기준을 어떻게 공유하는지는 경험적인 문제일 뿐으로, 가타부타 사전에 정해질 수는 없다. 보아스, 베네딕트, 허스코비츠 등의 문화 상대주의는 무엇보다도 각 사회 안에서 어떤 기준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그 사회 내부를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문제임을 분명하게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한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기준들이 모두 동등하게 옳은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동등하게 옳다”는 개념의 의미부터 확정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기준이 또한 사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만나게 된다. 더구나 다양한 사회에 다양한 기준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서부터 그것들이 동등하게 옳다는 규범적 결론을 끌어내려는 시도 역시 하나의 범주 오류가 된다. 가령 이 책 제5장(160쪽)에서 논의되듯, 요르단 강 서안의 아랍인 마을에서, 성폭행의 피해 여성을 그 가족이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질 때, 보통은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느낌은 본질적으로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한다. 명예 살인의 위험에 직면한 여성이 가족으로부터 도망쳐 도움을 청할 때, 한국인 여행자가 마침 약간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면, 상대주의는 이를 부당한 간섭으로 여겨야 하는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교조적 적용일 뿐이며, 인간 사회를 인간 사회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관습이나 규범이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주어진 관습 또는 규범에 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며, 나아가 주어진 관습 또는 규범을 개별 사례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견이 나온다는 점이다. 한 사회가 어떤 원칙을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그 규범을 어떤 사례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를 항상 품고 열려 있는 문제다.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고려 사항들을 대략 편의에 의해 생략하고 이뤄지는 결정은 아무리 “도덕”의 허울로 포장되더라도 기실 위력의 과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상대주의는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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